고구려 미천왕(美川王)과 연년(連年) 공방전을 벌이다가 민호(民戶) 1,000여 가를 이끌고 요서(遼西)의 모용씨(慕容氏)에게로 귀속하였다 하여 낙랑과 대방에서 마지막으로 물러나는 한족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고구려는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될 때, 현도군의 일개 속현(屬縣)으로 출발하였으나, 전
고구려에 전해주게 된 배경에 대해 그리 많이 알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진서』권 113 재서 부견전에 보면, 부견이 건원 6년 11월 모용씨의 전연을 멸망시키고 그 수도 ?에 입성을 한다. 이때 고구려는 고구려로 망명한 전연의 대전 모용평을 부견에게 박송하는 기사가 나와있다.
AD 349년에 전연 왕
고구려와 부여
1. 제부여의 구분
(1) 동부여
A-1 태강 6년(285)에 이르러 모용외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 왕 의려는 자살하고 자제는 옥저로 도망갔다. … (중략) 이듬 해 부여의 다음 왕 의라가 사신을 하감에게 파견하여 남은 무리를 이끌고 수도로 돌아가 옛 나라를 회복하는데 도움을 청하
모용외(慕容)의 침입을 두 차례 받는 등 위기를 겪다가 313년 미천왕(美川王:재위 300∼331) 때는 서안평을 확보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 한반도에서 한사군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다.
2. 영토확장과 전성기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재위 371∼384) 때 불교 공인과 태
1. 다음 문제 중 하나를 선택하고 서술해주세요. (25점)
⑴ 우리 역사에서 내가 존경하는 인물을 들고, 나에게 끼친 영향을 서술해주세요.
① 선정 이유
우리나라의 명군 하면 조선 세종이 꼽힌다. 물론 광개토대왕이나 고려 태조 왕건도 있지만 유독 조선 세종이 꼽히는 것은 그가 행한 정책과
추정된다.
2. 고구려
1) 위와의 전쟁
압록강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하던 고구려는 246년 위의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공격을 받게 된다. 당대 왕인 동천왕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와 양맥에서 승리했으나 이후 전투에서 1만 8천여 명이 죽는 대패를 당했으며, 환도성은 함락당했다.
1. 고구려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encykorea.aks.ac.kr).
동북아역사넷(http://contents.nahf.or.kr).
고구려의 전성기는 누구한테 물어봐도 광개토대왕, 장수왕이라 말할 것이다. 광개토대왕 때 갑작스럽게 전성기가 온 것으로 알고 있는 사
1. 서론 (주제선정이유)
고구려는 한국인의 머릿속에 있는 역사관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많은 한국인이 고구려에 대한 역사를 다른 삼국 시대 나라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다. 또한 고구려는 수많은 드라마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와서 친숙하기도 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고구려에 관심이 있는
고구려 지역이었던 곳에 분포되어 있으며, 신라, 백제, 가야 등도 고분 안에 벽화를 그렸으나 그 수가 매우 미미하고 현재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는 벽화가 드물다. 옛 고구려 지역에는 중국 집안 지역의 20여 기를 포함해 총 100여 기의 벽화 고분이 있으며, 그 내부에 있는 벽화 역시 그만큼 다양하다. 이
, 비의 발견 이후 수많은 탁본을 겪으면서 비면이 급속히 마멸되었다.
(2) 비문의 내용
-천하관 :
모두루묘지 내용,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을 '천제지자(天帝之者), 황천지자(皇天之者), 일월지자(日月之子)' 등 최고의 존칭으로 표현 : 당대 고구려가 천손국으로 천하의 중심임을 자부함